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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_그림이야기

사진보다 리얼한 음식그림, 강력한 19세기 막장드라마

by 토비언니 2023.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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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잠시 머리도 식힐 겸 시대적 흐름에 관계없이 장르에 따른 분류로 그림을 가볍게 감상하고자 합니다.

 

 

정물화, 인간의 욕망이 강력하게 투영된 그림

 

정물화는 영어로 'still life', 독일어로는 'Stilleben' 즉, '움직이지 않는 생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지난번 살펴본 17세기 중반 네덜란드에서 처음 사용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이 시기는 네덜란드가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기존의 귀족과 교회세력이 몰락하고 공화국으로 거듭나며, 시민사회에 어울리는 미술 장르에 부응할 수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역사화나 종교와 같은 어려운 주제보다 정물화, 풍경화 같은 소박하고 서민적인 주제와 형식의 그림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 무렵 정물화는 네덜란드에 이어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전반에 걸쳐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중세 말 이후 중산계급 생산자층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었고 화폐를 통한 경제활동이 증가하였습니다. 종교 주제는 제쳐놓고 시장의 과일, 야채, 그릇 등 사물들을 상인과 함께 크게 그림으로써 정물화가 독립된 장르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좌) A Meat Stall with the Holy Family Giving Alms by Pieter Aertsen (1551), (우) Still Life with Drinking-Horn by Willem Kalf (1653) /출처: Wikimedia Commons

 

 

아르헨의 <푸줏간 - A Meat Stall with the Holy Family Giving Alms>이라는 작품을 감상해보겠습니다. 널려있는 고깃 덩어리와 돼지족발, 가죽이 벗겨진 소머리 등이 그림의 가운데 푸짐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반면, 반대로 고기로 걸려진 동물들은 곧 잔인한 살육 뒤에 온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마치 당시 유럽의 물질적 풍요와 욕망이 가득한 사회상을 보여주지만, 아직까지 기존의 기독교적 윤리관이 강하게 남아 이와 같은 물질적 욕구를 견제하려는 이중적 태도도 남아있던 것입니다. 

 

다음은 빌렘 칼프(Willem Kalf)의 <성 세바스티아누스 궁사 길드의 뿔잔과 가재, 술잔이 있는 정물> 작품입니다. 어두운 배경 대비 화려한 상차림이 인상적인 그림으로 한눈에 봐도 비싸보이는 은세공품으로 받쳐진 무소 뿔잔과 맛있어 보이는 가재는 부유함과 여유,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정물화입니다. 화려한 색채의 사용, 사물에 빛이 반사되는 효과, 질감의 상호 조화는 인상 깊기만 합니다. 올리브 TV도 이렇게 맛있어 보이게 화면을 찍지는 못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음식물에 대한 정물화는 16~17세기 이런 정육점의 먹거리나 시장, 부엌의 풍경 등 아직 불완전한 정물화에서 주방 정물, 상차림 그림 등 분명한 정물화적 특성으로 발전해 나갑니다. 정물화는 대상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고, 배치가 가능하며, 색채와 명암, 질감, 공간 등 모든 것을 임의로 연출이 가능할 수 있기에 화가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올수 있지 않았을까요.

 

 

장르화, 일상의 모든 주제를 담다. 심지어 막장드라마 까지...

 

 

중세에는 대부분 그림의 주제가 종교와 관련된 것 이었고, 작품의 구매자는 대부분 교회나 귀족이다 보니, 자연히 거창하고 이상적인 소재를 중심으로 그려왔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집중해야 할 것은 바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주로 서민출신이었다는 것 입니다. 아마 화가 본인의 관점으로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것은 일종의 본능이 아니었을까요. 17세기 이후 일상 또는 풍속 주제를 그리는 것이 활성화되고, 18세기 들어 이런 그림들이 장르화(Genre Painting)라는 이름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장르화라는 말 자체에는 일상이나 풍속 등 의미가 들어있지 않지만 이렇게 불리게 된 이유는, 17세기 회화는 주제를 기준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많았었고, 당시 역사화 또는 비역사화로 양분화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즉 역사화 인가 아니면 역사화가 아닌 장르 인가의 포괄적인 의미로 장르화가 유래된 것입니다.

 

 

좌) The Spoiled Child by Jean-Baptiste Greuze(1765) 우) In a Caf&eacute; by Edgar Degas(1875-1876)/ 출처: Wikimedia Commons

 

 

장르화에는 다양한 소재가 들어있겠지만 장 밥티스트 그뢰즈(Jean-Baptiste Greuze)의 <말썽꾸러기>라는 작품에서 보듯 해학적, 풍자성이 돋보이는 작품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뢰즈는 주로 중산층이나 일반 서민층의 어른이나 아이에게 교훈이 될 만한 내용을 주로 그렸다고 하는데요. 고단한 일상을 보내며 아이를 위해 어머니는 음식을 차려주고 잠시 쉬는 듯 보이지만, 아이는 자기가 싫어하는 음식인지 어머니 눈치를 보며 슬쩍 식탁아래 강아지에게 먹이고 있습니다. 

 

또 다른 우측의 그림은 모든이에게 이미 익숙한 에드가 드가(Edgar Degas)의 <카페에서 - 압생트 한잔> 작품입니다. 19세기 후반 도시화/ 산업화의 변화 속에 빚어진 모순 중 하나는 '군중 속의 고독'이나 '소외감'이 다양하게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이 카페에서 라는 이름으로 1876년 처음 공개되었을 당시 많은 비난을 받으며 창고에 보관되었던 처지였고, 그 후 재전시되며 이름도 '압생트 한잔'이라는 자극적인 타이틀로 등장했지만 여전히 좋지 못한 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림 속 여자는 마네나 르누아르의 그림에도 잘 등장하는 당시 유명한 여배우인 엘렌 앙드레라는 여자로, 유행에 민감한 옷을 입고, 이른 아침 멍한 눈초리로 술 압상트를 마시고 있습니다. 반 고흐가 즐겨 마셨다는 중독성 강한 이 압상트는 너무 많이 마시면 미쳐버린다고 알려지며, 색상 때문에 초록 요정(la fee verte)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림은 압상트의 녹색을 강조하려는 듯 전반적으로 녹색조를 띠고 있으며, 독특한 구도가 눈에 띄는데요. 인물들을 이례적으로 오른쪽 상단으로 몰아서 처리했고, 왼쪽에 빈 테이블과 빈 병이 더 눈에 띄어 이 익숙하지 않음에 그림이 더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인물을 한 곳으로 몰아내고 빈 공간을 강조함으로써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른 모순과 공허함을 전달하고 있다고 봅니다. 

 

 

Past and Present by Augustus Leopold Egg (1858)/ 출처: Wikimedia Commons

 

 

다음은 개인적으로 너무 흥미진진하게 감상했던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화가 오거스터스 레오폴드 에그(Augustus Leopold Egg)의 <과거와 현재- Past and Present>라는 3폭 짜리의 재단화입니다. 그림의 내용은 빅토리아 시대 중산층 가정에서 부인의 간통이 발각되면서 비극적인 결말에 치닫는 과정이 마치 시청률 좋은 아침드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습니다. 

시리즈 첫 번째 그림은 아내의 간통 사실이 남편에게 발견된 듯 보입니다. 아내는 바닥에 엎드려 통곡을 하는 듯 보이고 손목엔 마치 수갑을 연상케 하는 금빛 팔찌가 눈에 뜨입니다. 남편의 손에는 편지와 같은 종이가 쥐어져 있고, 그 안에 부인의 부정 내용이 담긴 듯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거울을 통해 비친 열려있는 문 근처에 놓인 가방과 우산은 곧 그녀가 떠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두 번째 그림은 밤을 배경으로 어두운 침실에서 두 여자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그려져 있는데, 혹자는 첫 번째 그림 속 여자 아이들이 성장하며 이미 깨어져버린 가정에서 우울한 밤을 보내고 있는 것을 그린 것이라는 말이 있고, 또 다른 해석은 첫 번째 그림 속 간통한 부인이 다시 등장해서 앉아있는 여인의 무릎에 기대어 슬피 울고 있는 장면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세 번째 그림도 역시 밤 장면을 나타냈는데, 간통한 그 부인이 템즈 강가 다리 아이에 앉아 달을 쳐다보고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위태로워 보입니다. 그 와중에 그녀에게 덮인 옷 사이로 아이의 다리가 보이는데, 이 역시 여인이 불안을 가중시켜 보이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간통>을 소재로 갈수록 악화되는 여인의 모습을 그리며 도덕적 관념을 표현하고자 했던 당대의 막장드라마급의 시리즈물이 인상 깊게 느껴졌습니다.

근대시대로 접어들며 합리적 생활태도를 강조하고 허례허식과 부도덕한 삶을 비판한 이런 종류의 장르화 또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다는 점이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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