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보신 것처럼 14세기부터 16세기에 걸친 르네상스는 피렌체와 로마에 치우쳐졌던 것이 사실이지만, 지난번 감상하신 베네치아 미술과 지금 소개될 북유럽의 미술 또한 이와 대등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서로 다른 전통화법은 결국, 17세기 바로크회화에서 융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 키워드 –'사실주의', '유화의 발견', '얀 반 아이크'
앞에서 살펴보신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모직과 국제무역을 통해 활발한 경제 활동으로 부유한 시민계급이 성장했던 네덜란드, 벨기에 일대의 북유럽 지역 역시 1420년경부터 다른 장르의 르네상스가 꽃피워나게 됩니다.
이곳은 고전기의 유물에서 영감을 얻고 이상적인 비례의 미를 발견했던 이탈리아와는 다르게 고대유물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대신 정교하고 사실적인 기법을 통해 자연을 묘사를 하는 경향이 퍼져나갔습니다. 다시 말해, 이탈리아 미술처럼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한 영웅상과 신화적인 장면을 주로 묘사했던 것과는 다르게, 북유럽에서는 정교한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부유한 시민과 농부 등 초상화 처럼 관찰에 입각한 그림을 주로 그려나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동안 앞에서 보셨던 원근법, 명암대조법, 피라미드 구조와 함께 마지막으로 유화의 발견이라는 획기적인 르네상스시대의 미술 기법을 알게됩니다. 유화의 발견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자면, 르네상스 시대 이전에는 주로 교회의 벽면, 천장 벽화를 그리는데 '프레스코화'나 '템페라화'가 주류를 이루었는데요. 프레스코화(Fresco) 란 건조가 안된 젖어있는 석회벽이 마르기 전 그 위에 빠르게 그림을 그리는 벽화법을 말하고, 템페라화(Tempera) 는 색을 내는 가루 즉, 안료를 흡착이 빠르게 하기 위해 용매제로 계란 노른자를 섞어 그리는 방법으로, 둘 다 수성물감으로 그리기 때문에 쉽게 건조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더욱이 템페라의 경우엔 기포가 생겨 여러 번 겹쳐 칠하기가 어려워 입체감을 표현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벽화를 그릴 때면 석회가 마르기 전에 어서 빨리 그려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1495년 작품 <최후의 만찬 - The last supper>역시 전통적인 프레스코기법 극복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좋은 예인데요. 수도원식당 벽화로 폭 880센티에 달하는 이 큰 그림에서 젖은 회벽에 수성물감을 얹는 대신 마른 회벽에 기름과 템페라가 혼합된 안료를 실험적으로 사용하였으나, 제작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물감이 흘러내리며, 탈색현상이 일어나 많은 보수를 해야 했던 작품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후대에 찾아온 '유화의 발견'은 템페라에 비해 마르는 속도가 느려서 물감을 혼합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명암의 효과나 빛의 반사감은 화려해지고 색채감은 더욱 깊이 있게 변모합니다.
이런 유화의 기법을 완성도 있게 집대성한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의 1434년 작 <아놀드 피니 부부의 초상- The Arnolfini Portrait>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최초로 유화물감의 새로운 기법을 적용했다는 것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는데요.
딱 보시기에 미스터리하고 공포스러워 보이는 이 두 커플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이 그림의 구석구석 묘사된 Attribute에서 당시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놀드 피니가 결혼 서약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성스러운 곳에서는 신발을 벗으라’고 했던 성경구절에 비춰볼 때, 화면 왼쪽 하단의 남자가 벗은 샌들은 혼인이 일어나는 성스러운 장소임을 명시해주고 있습니다.
샹들리에 하나만의 불을 밝힌 양초 역시 중세이래 결혼의 상징으로 이용 되었구요. 침대 위쪽엔 순산의 수호성인 성마르가리타 상이 조각되어 있고, 거울 옆에 걸린 묵주는 결혼의 미덕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신랑이 신부에게 주는 가장 대표적인 선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발밑의 개는 번영과 충성을 상징하고 있구요. 창가에 놓인 과일은 아담의 사과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 신혼부부 역시 원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암시하며 침대의 붉은색은 첫날밤을 암시해 내는 것으로 이처럼 수많은 소품을 이용해 감상자에게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뒷편의 거울로 눈을 돌려보겠습니다. 거울 위쪽엔 “1434년, 얀 반 에이크가 여기에 있었다’라는 라틴어 서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그 볼록거울에서 말해 주고 있으며, 볼록거울 안에는 거울을 등지고 선 이 두 부부의 뒷모습과 그림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 방문자 두 명이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중 푸른 옷을 입은 남자가 바로 얀 반 에이크라고 전해지고 있는데요.
이런 숨은 요소 들 뿐만 아니라 이 그림이 진정 명화로 기억되는 것은 바로 그 만이 할 수 있었던 치밀하고 사실적인 세부묘사일 것입니다. 왼쪽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과 침대커버에 뉘어진 신부의 그림자, 강아지와 아놀드 피니가 착용한 윤기 흐르는 밍크코트의 털, 손금까지 볼 수 있을 만큼 정교한 손바닥의 묘사와 마룻바닥의 무늬는 놀랍기만 합니다.
인물들은 어떨까요? 반신상을 즐겨 그렸던 당시에 흔치 않게 두 인물의 전신상을 그린 작품으로, 파충류같이 차가워 보이는 아놀드 피니의 용모와 앳된 신부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는데요. 흔히 사람들은 신부의 불뚝한 배를 보고 속도위반으로 단정 짓곤 하지만 배부분이 부풀어진 옷은 당시 유행하던 복식 중 하나라고 합니다. 또 다른 비하인드 스토리 중 하나로 혹자는 본래 정식결혼의 경우엔 오른손을 맞잡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그림에선 두 사람이 왼손을 맞잡고 있는 것을 보아 둘 간의 신분 차이가 있거나, 또는 그의 애첩으로 소녀를 맞이한 것이 아닐까 하는 가설이 있곤 하지만, 그림을 반영한 당시 상황은 중세에서 탈피해 부를 축적한 개인의 소유로 그림이 그려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전까지의 르네상스는 고전적, 영웅서사적인 그리고 빛과 색채의 아름다움으로 장식된 미술을 보여줬다면, 북유럽미술의 번영과 함께 조금 더 현실에 가까운 사실주의 미술로 변모하며 업그레이드 하게 됩니다. 왠지 '무섭도록 사실적인' 이런 문구가 떠올랐던 얀 반 에이크의 그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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